결정장애. by 임기간




결국 T가 말해준 이야기를 글로 완성하는 일은 없었다. 변덕 때문이었는지, 다른 이유에서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기에 나와 T의 대화 사이에 쓴 짤막한 이야기들은 내가 그의 이야기에 기초하여 상상해본 것이다. 아마도 T가 그리던 세계와는 가젤과 임팔라정도의 차이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요새 생각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나와 T는 카페의 메뉴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햇빛이 강하고, 기온이 20도를 넘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망설임없이 아이스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T는 메뉴판과 한참을 눈싸움하다 말고 갑자기 말을 꺼냈다.

그런데?”

더위가 슬슬 눈치를 보면서 다가오려 하는 쨍쨍한 점심 무렵이었다. 카페 안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고, 꽤 넓은 카페에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덮을 정도로 보사노바가 흐르고 있었다.

...아냐, 그래. 선배! 나 딸기요거트스무디 시켜도 돼요?”

스킨헤드에 새파란 선글라스를 낀 점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기로는 T의 대학 선배라는데, 나는 그와 서로 통성명만 한 사이였다.

결정장애라는 게 있잖냐.”

가게 안에서 제일 푹신해 보이는 소파에 몸을 묻으며 T는 말을 이었다. 녀석은 건물주인 아버지의 후광을 받아 선배에게 카페를 내주고, 매일 여기서 시간을 보내면서 글을 쓰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하면서 베짱이처럼 살고 있었다.

결정장애.”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찾아 보았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느 한 쪽을 고르지 못해 괴로워하는 심리를 뜻하는 신조어.

그래, 결정장애. 너랑은 연이 없어 보이는 말이긴 하다만.”

나는 취업준비생이라는 허울좋은 백수 생활이 내키지 않을 때마다 T가 있는 카페에 놀러 갔다. 고맙게도 점장인 그 선배는 음료수값을 받지 않았고, 나는 되도록 폐가 되지 않을 것 같은 평일 점심에 카페를 방문하곤 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결정을 내리는 편이었다. 어떤 것이든, 무모할 정도로 빠른 결단을. 결과가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었다. 카페에 와서 먹는 음료도 더운 날이면 아이스 카페라테, 그렇지 않다면 따뜻한 카페모카를 마셨고, T는 언제나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제멋대로 음료수를 주문하곤 했다.

주인공이 결정장애인거야. 근데 이 세계에서는 결정장애에 걸리면 몸 어딘가가 결정結晶이 되어버리는 거지.”

보석처럼?”

그게 보석일 수도 있고, 별볼일 없는 광물일 수도 있지. 아니면 소금이나 설탕일 수도 있고.”

설탕이면 시럽 가지러 갈 일은 없어서 좋겠군.“

기분나쁘게 덜그덕거리는 진동벨을 들고 음료를 받으러 갔다. 나는 점장에게 가볍게 목례한 뒤 자리로 돌아와 음료를 T에게 건넸다.

그렇게 웃기는 상황은 아니지, 어느 날 결정장애 때문에 십이지장이 결정으로 변한다고 생각해 봐.”

십이지장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장이 소금으로 변하는 것을 상상해보고 나는 몸을 떨었다.

미안, 징그러운 이야기를 할 생각은 아니고, 어쨌든 결정장애에 걸리면 몸이 결정이 된다는 거야.”

“...수준낮은 말장난이구나.“

그래서 재밌는 거지, 어쨌든 주인공이 결정장애에 걸리는데.”

나는 카페라테를 크게 한 모금 마시면서 T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눈이 결정으로 변해 버린 거야.”

T와 사귄 지는 꽤 오래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녀석의 말장난이 세련되어지는지, 저속해지는지를 판단하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왜 눈이, 아니. 무슨 결정이 되는데?”

, 그건 아직 정하지 않았어. 어쨌든 주인공은 결정장애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된 거야.”

아예 안 보이는 거야? 시각장애인이 된 거라고?”

그건 아니고, 결정장애가 오면 눈이 안 보이는 거지.”

 

별 것 아닌 생각들이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그런 생각들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어린왕자가 받은 상자 속 양의 모습이라거나 언제나 술에 취해 들어오던 아버지의 얼굴이 우스웠던 이유들에 대해서. 걸리버 눈에 보인 소인국의 사소한 싸움들과, 얼음을 깨물어 먹을 때 이빨에 날카롭게 울리는 시린 고통들에 대해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처음으로 눈이 얼음으로 변하게 된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우습게도 마트에서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있던 때였다. 커다란 통아이스크림을 한 손에 껴안고 숟가락으로 퍼먹으면서 티비를 볼지, 자그마한 메론바를 들고 동네를 뛰어다닐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아이스크림이 수북히 쌓인 냉장고에서 나오는 냉기 때문에 머리가 아픈 것이라고 생각했다. 같이 아이스크림을 고르던 친구가 놀라서 넘어지며 소리를 지를 때까지도 그는 설마 자신의 눈이 얼음이 되어 버렸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시리고 날카로운 격통이 얼굴에 퍼져나갔다. 병원으로 급하게 옮겨져서 결정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가 생각한 것은 처량하게도 못 사먹고 나와버린 아이스크림에 대한 것들이었다.

 

너무 편의적인 것 같은데.“

그런가? 한번 결정이 되어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바로 눈을 빼고 의안이나 다른 치료를 했을 것 같아서.”

그럼 그 세계에선 결정장애에 걸린 사람은 다 그런 식이란 말이지.”

그래. 결정에 따라 불편함이 달라지긴 하겠지만.”

나는 카페에서 음료수를 주문하려다 갑자기 온몸이 황금으로 바뀌어 버리는 친구를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세상에 결정장애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그래서 그 세계는 지독하게 직관적인 거야. 사람들은 결정장애에 걸리지 않으려고 애써서 고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지.”

나는 모두가 고민하지 않는 직관적인 세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차분할 것 같기도, 지독히 혼란스러울 것 같기도 했다.

막상 지금 떠오르는 것만 해도 문제가 산더미인 것 같은데.”

예를 들어?”

경제 시스템이라던가, 법이라던가.”

 

그는 고민하지 않는 세계에 있다. 모든 사람들이 결정장애에 걸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이 다양한 방식으로 결정장애에 걸려 있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부위가 비싼 결정으로 바뀐 사람들은 하루종일 시도때도 없이 고민을 하며 몸을 결정으로 바꾸려고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결정장애는 귀찮은 질병에 다름없었다. 선택에 고민이 없어졌고, 세계는 새로운 기준으로 변화되어갔다. 하지만 그는 굳이 결정장애가 없었더라도 세계가 다른 모습이었을 것 같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모두 제멋대로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민은 선택에 그렇게나 중요한 요소였을까. 고민의 가치가 지독히도 낮아진 세계에서 그는 스스로의 고민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려다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까? 고민을 하지 않는다는 거지 선택지가 없는 건 아니니까.”

결정이란 건 단순히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고르는 게 아니다. 나는 T의 말을 되뇌었다.

그래. 결정하는 걸 주저하는 게 결정장애니까. 뭐 몸에 무해한 부위에 결정이 생기는 사람한테 고민을 맡길 수도 있겠네. 그리고 결정에 따라서는 오히려 고민을 하는 쪽이 나을 수도 있고. 머리카락이 금으로 바뀌는 사람은 얼마나 좋겠어.”

과연 그럴까.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닐 것 같은데.”

어려운 건 소설적 장치로 넘어가자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주인공이 어떤 사건을 겪게 되는가잖아?”

나는 귀찮은 생각을 그만두고 친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이야기니까.”

주인공은 결정을 해야 될 때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고 했지? 근데 이 주인공은 고민이 엄청나게 많단 말이지. 결정장애를 고칠 수가 없어. 아침에 일어나서 침대에서 일어날까 말까를 고민하다 눈앞이 어두워지고, 식사를 고르는 데도,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도 눈앞이 캄캄해지는게 일상다반사지.”

결정은 얼마나 빨리 원래대로 돌아오는 거지? 하루에 몇 번이고 그렇게 갑작스럽게 눈이 보이지 않게 되면 죽지 않는게 용하겠는데.”

사람마다 다르겠지. 고민하는 건 사람마다 다 다를테고, 얼마나 결정하는게 어려운지는 개개인이 정하는 거니까.”

T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다 말았다.

그래, 그는 결정장애가 오면 눈이 얼음이 되는 건 어때?”

눈이 눈이 된다. 나는 녀석의 말장난이 점점 악화되어 간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사소한 고민들은 좀처럼 없어질 생각이 없었다. 얼어가는 눈은 가장 먼저 그의 시각을 뺏어가고, 시린 통증이 머리속을 날카롭게 찔렀다. 그가 원하지 않을 때 눈앞이 캄캄해지면, 그는 되도록 직관적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눈이 얼음이 되어가는 어두운 세계 속에서 그는 얼음이 녹는 것을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커다란 얼음에서 물방울이 한 방울씩 똑, 똑 하고 떨어지는 것을 한결같이 생각하고 있으면 시야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고통 속에서 집중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지만, 그는 나름대로 그 눈과, 얼음과, 녹아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대해 익숙해질 수 있었다.

 

주인공은 직업이 뭘까?”

시간에 자유로운 직업이면 되지 않겠냐. 건물주 아들이라던가.”

내 직업도 없는 판에 가상의 누군가의 직업을 골라줘야 한다니, 나는 귀찮은 듯 말을 던졌다.

건물주 아들은 고민이 없다고 누가 말했지?”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나는 모든 건물주의 자식들이 고민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방금 떠올랐어.”

T는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아냐, 건물주 아들보다는...속기사가 좋겠어.”

속기사?

그래,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는 고민하기 어렵잖아. 너는 러시아어로 말하면서 이태리어로 된 시를 속으로 암송할 수 있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언어는 달라지겠지만, 하고 사족을 붙였다.

거짓말 하지 말고. 어쨌든 갑작스럽게 눈이 안 보여도 속기사라면 말하는 내용에 따라 손을 움직이면 되니까.”

설정이 너무 안이하지 않냐?”

단순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직업이라면 굳이 속기사일 필요는 없다.

, 정 모르겠으면 고등학교 동창이 속기사니까 물어보면 되겠지.”

녀석은 스무디를 시원하게 빨아먹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래서, 속기사에다, 가끔씩 눈이 안 보이는 주인공이 어떻게 되는데.”

 

속기한 것들을 정리하거나 교열할 때에는 물론 눈이 보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 누군가의 목소리를 속기로 기록할 때에는 스스로의 어두운 세계 속을 선호했다. 누군가의 목소리는 그를 어두운 세계 속으로 이끄는 것 같았다. 결정장애에 걸린 그날부터, 그에게 어둠은 무섭거나 섬뜩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생각에 깊게 빠질 때 그에게 찾아오는 어둠은 모든 것이 사라진 차분한 공간이었다. 시각을 잃은 세계에서 청각은 그를 이끌어주는 불빛일 때도 있었고, 그를 현혹시키는 도깨비불이기도 했다.

 

그의 고민은 수면부족이야.”

수면부족.

밤에 집에 혼자 누워 있으면, 이런저런 생각이 들잖아. 눈을 감은게 자기가 눈을 감은건지, 눈이 결정장애로 감겨진 건지 몰라서.”

그래도 잠은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잠을 상당히 잘 자는 편이었고, T는 불규칙한 생활 때문에 잠을 잔다기보다 배터리가 떨어진 스마트폰 같은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눈이 결정화된 상태로 잠에 들면 항상 악몽을 꿔.”

 

정신을 차리면 그는 언제나 눈 내리는 설원에서 모닥불 앞에 앉아 있다. 손발에 느껴지는 차가운 아픔은 언제나 그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는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꽃에 따뜻함을 느끼다가도, 장작을 자세히 살펴보면 스스로의 양 손과 양 다리가 서로 지지하듯이 세워져서 타오르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꿈속의 세계임을 자각하고 있지만 그가 꿈에서 깨어날 수는 없다. 불꽃의 색깔이 점점 검게 변하고, 하늘에서 내린 눈의 결정이 점점 커지다가 안구로 변하기 시작한다. 아무도 없는 평원에서 생생할 정도로 피와 신경으로 이어진 안구들이 한 곳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는 시선이 모닥불로 향하는 것을 느낀다. 시야가 새하얗게 변한다. 스스로의 눈이 차갑게 시려오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잠에서 깨어난다.

 

그렇게 맨날 꾸는 악몽이 싫어서 깨어있다 지쳐 잠이 드는 나날이 이어지는 거야. 지금 하는 일, 지금 일어나는 상황에만 집중하면 결정을 내리기가 편한데, 어쨌든 그게 머리 속 한구석에 먼지처럼 쌓여서 잠을 자려고 눈을 닫으면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떠올라. 결정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하지만 나아가려면 결정할 수밖에 없어. 그런 와중에도 섣부른 결정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이 점점 자기확신을 희미하게 만들어가.”

 

악몽을 꾼 아침에는 언제나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머리가 아팠다. 팔다리가 얼어버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고, 아무리 몸에 힘을 주려고 해도 좀처럼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대로 온몸이 얼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무서움보다, 직장에 늦으면 어떡하나를 걱정했다. 머리맡에 놓인 양철 알람시계가 시끄럽게 몸을 진동시켰고, 그 소리에 그는 가까스로 침대에서 떨어지듯 일어날 수 있었다.

 

전문병원 같은 곳에 가 보면 되잖아.”

T는 씨익 웃었다.

그래, 그래서 그는 병가를 내고 심리치료를 받으러 가.”

 

, 보세요. 의사는 자신만만하게 스스로의 손목을 내밀었다. 순간, 그의 손목이 은회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광택으로 그것이 금속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섬뜩한 기분이 되었다. 선생님, 무섭지 않으십니까? 손목이 아닌 곳에서 결정이 되면 어쩌시려고. 의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렇게 할 수 있으면 고민은 무섭지 않아요. , 보세요. 결정이 손목에만 변했죠? 이건 스텐레스인데, 중요한 건 결정의 종류가 아니라 부위입니다. 고민을 할 때 어떤 한 가지를 강하게 생각하는 거에요. 고민을 집중시키고, 강화시키는 거지요. 스스로가 고민을 컨트롤하는 거에요. 사실 점심 메뉴같은 사소한 것으로 결정화가 되기 쉽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환자분이 진짜로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걸 해결하기만 한다면 그런 사소한 문제 따위는 결정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환자분이 정말로 고민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지요?

 

그래서, 그 사람은 뭐 때문에 고민하고 있냐?”

딱히 없어. 고민이 없다는 게 고민이 아니라.”

딱히 고민이 없는 사람이 결정장애를 일으킬 수는 있을까. 나는 약간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정장애는 일어난다.“

그렇지. 굉장히 소소한 일인거야. 점심을 뭘 먹을지. 주말엔 뭘 할지라든가. 의사가 하는 말도 일리는 있지만, 모든 일이 한 가지 방법으로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겠니.”

단순히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를 몰라서 그런 것 같은데.”

나는 마저 남은 카페라테를 전부 빨아마셨다. 얼음이 소리를 내면서 덜그럭거렸다.

 

그는 눈이 시려오는 것을 느끼며, 의사에게 질문했다. 선생님, 매번 상담할때마다 그렇게 피부가 변하는 걸 보여주시나요?

. 그럼요. 그는 질문을 삼키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방을 나섰다.

선생님은 진짜로 결정장애인가요?

어둠 속에서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심리치료가 도움이 되진 않았어.”

 

심리치료는 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말로 고민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으니 세상에 있는 엄청나게 많은 고민들 중에 스스로의 것을 찾아야만 했다. 결국 그는 스스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니, 무엇을 싫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느껴지는 공허함은 그를 불안하게 했지만, 어떤 한편으로는 굉장히 편안하게도 해 주었다. 눈을 감고(혹은 눈이 가려진 상태에서) 좋아하는 것들과 싫어하는 것 사이의 비어있는 틈새를 생각하고 있자면 그는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고, 얼마간 그는 편안한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편하게 끝날 리 없을 것 같은데. 설마 이걸로 끝이야?”

나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물었다. T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고민을 줄이기 위해서 그는 생활을 단순화시키기 시작했다. 선택지를 극단적으로 줄이고, 패턴을 만들고 그 안에 스스로를 적용시켰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듯이, 배가 고프면 식사를 하듯이. 이럴 경우에는 이렇게, 저럴 때는 저렇게. 그는 아무것도 선택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모든 것을 미리 선택해놓으려 했다. 그의 세계는 점점 단순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당연히 아니지. 아무리 미뤄놓아도 언젠가는 해야 할 일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왜 매번 아이스 카페라테만 드세요? 그렇게 물어본 것은 직장에서 자주 식사를 함께하는 후배였다. 그녀는 그와 전혀 접점이 없는, 관심이 많고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그가 스스로의 평화를 위해 직장에서의 고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그녀는 스스로의 호기심을 위해 그와 가끔씩 시간을 같이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질문에 그는 당혹했다. 어째서. 그것은 그가 무의식적으로 피해오던 질문이었다. 한번 들어 버리면 다시는 잊어버릴 수 없는 그 질문은 그를 깊은 고민에 빠지게 했다. 왜 나는 카페라테를 먹어야만 했을까? 왜 따뜻한 홍차를 마시면 안 되었던 걸까? 카페의 많은 메뉴 중에 굳이 카페라테를 차갑게 마셔야만 했던 것일까?

 

결정장애가 점점 확대되기 시작한 거야. 눈에서, 시신경을 따라 뇌로.”

나는 시각을 담당하는 시상하부에 문제가 생기면 수면질환이나 체온조절이 어려워지고, 정신질환이 온다는 것을 T가 알고 있었을지 궁금했다.

 

고민하기 싫어서 무작정 행동을 고정시킨 것은 눈의 아픔을 덜어주었지만, 한 번도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이유를 생각하면 언제나 머리가 아파서, 그는 언제부턴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누군가가 하는 대로 따라하다가 그것이 마치 원래부터 좋아했던 양 선택한다. 적어도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봤었어야 했다. 행동을 따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이유까지 따라했었어야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스스로의 이유도 찾지 못하는 인간에게 타인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오로지 고통이 없는 상태를 원했다. 세차게 흐르는 커다란 물줄기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어느 날, 그는 고통이 사라진 것을 깨닫는다. 시험 삼아 잠깐 고민을 해 봐도, 눈에서부터 시작해서 머리 밑쪽 깊숙한 곳으로, 이윽고 척추를 따라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시린 고통이 눈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그는 갑작스런 평화로움에 당황했다. 그렇게나 원했던 것이 손에 들어왔음에도 그에게는 어딘가 꺼림칙하게, 소름끼칠 듯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고통이 사라졌다고 해서 굳이 고민을 해야 될 필요는 없었으므로, 그는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가려고 했다.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는데?”

T는 생각 이상으로 내가 이야기에 빠져든 것이 놀랐던 모양이었지만, 창밖을 바라보면서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 쓰다 말아서, 모르겠는데.”

김이 샌 나는 T와 내가 먹은 컵을 트레이에 올려놓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다 쓰고 이야기하는 게 좋지 않았냐.”

다 썼으면 그냥 너한테 보여줬겠지. 어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밌네.”

특히 어떤 부분이?”

T도 뒤이어 일어나며 갈색 잠바를 걸쳤다.

어이없게 도중에 끝난 부분이. 소설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

컵을 돌려준 다음 우리는 바깥으로 나왔다. T는 담배를 꺼내물고 나에게 권했다.

끊은 지 오래다. 다 쓰면 또 불러.”

T는 손을 흔들며 매운 연기를 뿜었다.

그래. 다음에 봐.”

나는 T와 헤어져 걸으면서 생각했다. 그는 동상에 걸린 것이다. 나는 멍하니 스스로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는 생각해야 했다. 이대로라면 얼어버린 뇌가 온몸에 퍼져나가 버린다. 온몸이 검게 말라버리기 전에, 스스로의 이유를 찾아야만 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왜 그 외의 것은 싫은지. 어째서 좋아하는지, 어떻게 싫어할 것인지에 대해서.

그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악몽 속의 평원에서도, 속기타자를 끊임없이 두드리는 시간 속에서도, 집에 돌아와서 멍하니 침대에 누워서도 자신의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놀랐던 점은, 싫어하는 이유보다는 좋아하는 이유를 들기가 더 어려웠다는 것이다. 싫어하는 이유는 한 가지로 충분했지만,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로는 부족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왠지 모르게 부족해 보이는 좋음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그는 눈을 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어느새 얼음이 녹는 봄이 와 있었다.

 


인어의 목소리. (3) by 임기간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정말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나는 칠판을 들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에서는 당연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수업에서 지목될 때는 칠판에 답을 써서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부끄러웠지만 나 이외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어서, 나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워졌다.

, 똑같을 거라고 했지?”

부장은 내 목소리로 물었다. 아야 선배도, 선배가 있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책장에 수북이 꽂혀 있던 책들이 없어지고, 선배가 좋아하던 찻잔도, 주전자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부장은 검은 정장에서 평범한 청바지를 입고, 하얀 터틀넥을 입고 있었다. 대신 커다란 인형을 끌어안고 복화술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건...?

언젠가 박선배가 내게 준, 내가 그녀에게 돌려 준 검고 커다란 곰인형이었다. 힘없이 처진 눈과 볼에 달린 빨간 홍조. 부장의 복화술은 마치 인형이 말하는 것처럼 능숙했다.

어제 게임센터에서 뽑았지. ?”

아뇨. 아는 사람이 가지고 있던 거랑 똑같이 생겨서.

나는 띄엄띄엄 칠판에 일본어를 써 나갔다. 일본어를 쓰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래? , 그럴 수도 있지 않겠어?”

같은 게임센터에서 뽑았다거나, 인형가게에서 같은 인형을 샀다거나, 이유는 많았지만 부장은 왜 지금 저 인형을 가지고 복화술로 말을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한 거죠?

뭐가? 목소리를 어떻게 없앴냐고? 아니면 이 곰인형을 어디서 얻었냐고? 아니면 왜 사람들이 목소리를 잃어도 신경을 쓰지 않나고? 그걸 알려줄 순 없지. , 다시 목소리를 돌려주길 바래?”

곰인형이 기묘한 움직임을 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직 목소리를 돌려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아직은 아니지.”

내가 듣는 내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다른 사람의 것처럼 이상하게 들렸다.

 


부장은 내 목소리로, 한국어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부장의 말대로라면 나는 한국어를 잊어버렸을 텐데, 부장이 말하는 한국어는 자연스럽게 뜻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하는 한국어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매일 동아리방에 들려 칠판에다 일본어 쓰기를 연습했고, 용기를 내서 대학에서 수업 중인 언어학 수업의 청강을 들으러 갔다. 수업을 담당하는 교수는 수업이 시작된 지 상당히 오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유학생이 언어학 수업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 흥미롭다며 청강을 허락해 주었고, 가끔씩 스터디 모임에도 불러 주었다. 나는 열심히 일본어를 배우고 싶었고, 사라진 기억을 대신하듯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야 선배가 말한 것처럼, 목소리를 잃고 두 다리를 얻어 인간 세상으로 올라온 인어공주처럼 나는 기묘한 방식으로 사회에 녹아들었다. 필사적으로 일본어를 공부했고,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을 만큼 칠판에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칠판으로 대화하는 것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분명히 나뉘는 대화 방식이었다. 휘를 포함한 한국인 친구들은 점점 멀어져갔고, 대신 스터디 모임이나 교수와의 인맥을 통한 일본인 친구들이 늘었다. 누구와도 이어지고 싶지 않다고 바랬을 텐데도, 목소리를 잃은 후부터 점점 내 주변에는 사람이 모여들었다. 누나에게 카카오톡을 보낼 수 없었지만 매달 통장에 입금되는 돈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분명히 누나 쪽도 자동이체나 어떤 수단을 통해 돈을 입금하고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렇게 사람이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면서 인간관계에 인력과 척력이 생겨났다. 나는 겨우 스스로의 중력을 인식할 수 있었고, 일본이라는 새로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해나갔다.

 

 

일본어 실력은 점점 늘었고, 어학당 수업보다는 언어학 교수의 스터디 모임을 훨씬 더 열정적으로 준비하게 되었다. 학회에 참여하고, 교수를 도와 자료를 정리하거나 레포트를 작성했다. 바쁘기도 했고, 그다지 가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아 동아리방에는 그날 이후 거의 찾아가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가 듣는 자신의 목소리는 생각 외로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그때서야 자각했다.

그리고 어느 날 박선배가 내가 있는 교수의 연구실로 찾아왔다.

여기 있다는 이야기를 친구한테 들어서...잘 지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박선배라는 사람인 것은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를 잃은 탓인지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가 서로 어떤 사이였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가 말하는 한국말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서 나는 평범하게 인사를 건넸다.

, . 그랬지. 미안해요. 잘 지내고 있나요?”

박선배는 그제야 뭔가가 이상한 지 일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와의 관계가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해내려고 했지만, 안개가 낀 것처럼 기억이 애매했고,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파왔다.

. 그쪽도 잘 지내고 있나요?

내가 칠판에 쓴 글자를 보고, 박선배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녀가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나는 황급히 박선배를 자리에 앉히고 뜨거운 차를 태워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차를 건네받았다.

괜찮으세요?

그녀가 겨우 울음을 그친 뒤, 나는 살며시 칠판을 보여주었다.

, , .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아요.”

교수님을 찾아오셨나요?

교수에게 무슨 일이 있다거나, 긴급한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다거나. 하지만 그런 일로 사람이 갑자기 울기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요, 당신을 만나러 왔어요.”

저를?

그래요. 당신을 만나러 왔어요.”

박선배는 알 수 없는 한국어를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나는 새로 만난 박선배와 사귀게 되었다. 박선배는 시간이 날 때마다 내가 있는 연구실에 놀러 왔고, 나도 그런 그녀가 싫지만은 않았다. 그녀와 이야기하고 있으면 어딘가 만난 적이 있는 친구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 편안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학기가 끝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어학당에서의 별것 아닌 시험을 끝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교수와 함께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려는 무더운 여름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의 마지막 주말, 박선배와 나는 조금 이른 여름휴가를 가마쿠라로 다녀왔다. 탁 트인 바다와 고풍스럽게 늘어선 거리. 커다란 불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네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었어.”

박선배는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정해진 유학 기간이 끝났고, 한국에 돌아가서 다시 대학을 다녀야 한다. 하지만 나는 한국어를 모르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걱정하지 마. T군은 한국어를 알고 있어.”

그녀를 배웅하는 지하철 역 앞에서, 그녀는 나를 끌어안고 그렇게 말했다.

어째서죠?

지금은 단지 목소리를 팔아버렸을 뿐이야. 목소리를 돌려받으면 당신은 돌아갈 수 있어. 하지만 그래도 나를 잊지는 말아줘.”

목소리를 팔아버렸다?

어째서 그녀는 내가 목소리를 팔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다음 날, 오래간만에 동아리방에 들렸다. 부장은 언제나처럼 커다란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야아, 오래간만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앉았다.

어때? 선배랑은 잘 되어 가? 하지만 슬슬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나? 헤어지기로 한 거야? 그래서 사귀는 것도 싫어했잖아. 어차피 돌아가야 할 텐데, 괜히 사귀어서 그녀를 상처줄 건 없지 않냐고.”

축 처진 눈빛을 한 곰인형이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웃었다.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거죠?

휘갈겨 쓴 글자를 어떻게 읽었는지 몰라도, 곰인형은 두꺼운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잊은 거야? 이 목소리는 네 거라고. 이어져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

곰인형의 움직임은 이윽고 춤으로 바뀌고, 목소리는 점점 커져 갔다.

박선배는 어떻게 내가 목소리를 팔았다는 걸 알고 있죠?

아무하고도 말하고 싶지 않다. 누구랑도 이어지고 싶지 않다니. 웃긴 이야기지. 그래서 그 여자에게 알려 준 거야. 너는 우스운 인형이었지. 스스로가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밀려오는 값싼 호의에 금세 스스로를 잊어버리는 꼬락서니라니.”

부장은 곰인형을 내팽개치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즐겁다는 듯,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칭찬해 줄게. 돌아갈 날을 잊지는 않았으니까. 돌려받을 날을 잊지는 않았으니까. 그래. 새로운 삶이었어, 그렇지? 기억도, 목소리도 잃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신으로, 과거의 스스로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롭게 살아보고 싶었던 거지? 인정해, 즐거웠잖아? , 물론 나도 색다른 경험이라 즐거웠어. 아야 선배는 목소리를 잃고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담담히 고독에 몸을 묻고 연구에 전념하더군. 역시 대학원생은 뭐가 달라도 다른 걸까? 너도 연구실에 있어 봤잖아, 어떻게 생각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자극이 부족하긴 했지만,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지. 그 사람의 기억은 온통 풍경투성이었으니까. 유람선을 탄 기분이었다고 할까?”

돌려달라고 하면, 돌려받을 수 있나요?

칠판에 쓰는 손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손목에 모래주머니를 단 것 같은 무게감이 손을 자꾸만 느리게 했다.

, 물론이지. 하지만, 의심해보는 게 좋아.”

무엇을?

목소리를 되찾은 너는 누구일까? 나에게 목소리를 팔기 전의 고독하던 너일까? 아니면 목소리를 잃고 사람에게 둘러싸인 너일까?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채 어디에도 있을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려는 새로운 너일까?”

부장은 곰인형을 다시 끌어안고 웃었다.

새로 쌓인 기억이 목소리에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해. 목소리는 크고, 잘 울리거든.”

동아리방의 문이 열렸다.

, 이제 돌아가. 눈을 뜨면 목소리는 돌아와 있을 거야.”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박선배의 모습에 나는 들고 있던 칠판을 떨어뜨릴 뻔 했다.

어째서, 그녀가?

박선배는 나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울던 그때처럼, 그녀의 표정은 슬픈 듯 흐트러져 있었다.

“‘다음 고객님 이라는 거지. , 이제 가보도록 해. 안녕. 즐거웠어.”


 

덜컹거리며 상승하는 비행기 좌석에서 나는 동아리방에 들어온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가 잃고 싶은 목소리는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어떤 기억을 잃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의심해보는 게 좋을 거야.”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가 착륙하고, 비행기 문을 나서며 나는 입을 열고 살짝 목소리를 내 보았다.

, .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나는 승무원의 인사를 뒤로 하며, 아무 말 없이 걸어나갔다. 무엇을 의심하면 되는 걸까. 나는 공항 개찰구를 나와 어두운 밤거리를 캐리어를 끌고 걸어나갔다. 가로등 불빛이 타닥타닥 불꽃을 튀기다 꺼졌다. 갈 곳 없는 목소리가 길을 잃고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인어의 목소리. (2) by 임기간





나는 학생회관을 나와 학교 근처의 공원에 들렸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은 아니었지만, 공원을 빙 둘러서 지하철역 앞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었기 때문에 종종 공원을 산책하곤 했다. 벚꽃이 한바탕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공원 곳곳에는 꽃놀이를 하러 온 학생들과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는 인적이 드문 길을 찾아 걷다 커다란 벚꽃나무 앞 벤치에 앉아 멍하니 고개를 젖히고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았다.

졸업을 앞둔 채 일본에 온 지 두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왔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함께 살던 누나와 심하게 다퉜고, 사귀고 있던 여자친구와도 결국 헤어졌다. 어느날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어 학교의 커리큘럼에서 발견한 유학을 가기로 결심했다. 학비를 대 준 누나와는 일본으로 출발할 때까지 만날 수 없었다. 우리가 가족으로 이어져 있다는 증거는 누나에게서 매달 들어오는 생활비와 그걸 받고 내가 보내는잘 지내고 있다는 한 줄의 카카오톡 메시지밖에 없었다.

그렇게 떠나온 곳에서도 그렇게 즐겁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학당의 일본어 수업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그 수준이 그렇게 높지 않았고, 대학 학부 수업으로 가자니 덜컥 겁이 났다. 달리 할 일도 없어 어학당에 있는 높은 레벨의 수업을 전부 수강하기로 결정했다. 매일 아침 9시부터 어학당에서 수업을 듣고, 점심시간이 되면 매일 먹는 가라아게 도시락을 먹고, 휘나 다른 한국인들과 떠들거나 놀러 다녔다. 그러다 보니 수업 이외에는(심지어 수업에서조차) 일본어를 쓸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면 집에 와서 멍하니 책을 읽다가 잠을 잤다. 이상하게도 졸리지 않더라도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면 정신을 잃고, 다시 눈을 뜨면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었다.

적당히 이야기하거나 시간을 보내면 된다. 나는 부장이 한 말을 다시 말해보았다. 새로운 곳에 온 만큼,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예전의 나를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왠지 모를 고양감에 눈이 부셨다. 벚꽃잎이 흐드러지게 떨어져내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오늘은 술 먹으러 갈 거지? 박선배가 벼르고 있던데?”

휘는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챙기며 물었다. 박선배는 같은 한국인 유학생으로, 자주 술자리를 만들어서 한국인 유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미안, 새로 동아리에 들었는데 거기 가볼까 해서.”

나는 가방을 짊어지며 말했다. 휘는 눈이 둥그레져 물었다.

그래? 어딘데?”

외국인 언어교환 연구회라는데.”

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런 데가 있었어? 흐음...뭐 이 학교는 동아리 많은 게 자랑이니까. 다음엔 꼭 껴야 돼. 박선배가 형이랑 언제 술 먹냐고 맨날 난리니까.”

그래. 다음에 한번 갈게. 박선배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줘.”

나는 휘와 헤어져 학생회관으로 향했다. 동아리방에 들어가니 아야 선배가 혼자서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최대한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기...한국에서 오셨다고 했죠?

아야 선배는 허둥지둥 칠판에 글씨를 써서 보여주었다.

, . 아야...선배라고 부르면 되나요?”

. 편하게 불러 주세요.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멋쩍은 침묵을 어떻게든 깨 보려고 나는 질문을 던졌다.

...목소리는 뭔가 몸이 안 좋으신 건가요?”

사정이 있어요.

동아리에 들어온 첫 날. 부장이 말했던 말이다. 사정(事情). 일의 형편이나 까닭. 가방에서 꺼낸 전자사전의 불빛이 희미하게 명멸했다.

당신도 조만간 알게 될 거에요.

조만간 ? 나는 모르는 단어를 전자사전을 꺼내 찾아보았다.

아야 선배는 두꺼운 논문을 열심히 쳐다보며 모르는 단어를 칠판에 써 보고는 지우고, 써 보고는 지우고를 반복했다. 그녀가 무척 집중하고 있는 듯하여, 나는 아무 말 없이 책을 읽다가 함께 차를 마셨다. 부장은 그날 내내 동아리방에 오지 않았다.

수고했어요. 다음에 또 봐요. 아야 선배는 칠판을 들어 나를 배웅해 주었다.

 

 

부장은 어느새 나에게 반말을 했고, 가끔씩 영문 모를 외국어를 불쑥 말하는 경우가 있었다. 궁금해서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물어봤더니 덴마크어라고 했다.

인어공주 이야기를 만든 안데르센이 태어난 곳이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부장은 덴마크어로 말했다.

인어공주 이야기 몰라? 디즈니가 만든 애니메이션은?”

어릴 때 본 기억은 나는데...”

그거랑도 꽤 다른 이야기지만. 아야 선배, T군에게 설명해 주겠어?”

. 인어공주는 1836년 안데르센이 쓴 동화로, 인어공주가 육지에 사는 인간 왕자님을 사랑하게 되죠. 하지만 인어공주는 인어였기 때문에 육지에 올라올 수 없었고, 왕자를 만나기 위해 마녀와 거래를 해요. 자신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대가로, 육지에서 살 수 있는 인간의 두 다리를 받아요. 마녀는 왕자가 인어 외의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면 인어공주가 죽게 될 것이라는 저주를 내리죠. 하지만 왕자는 다른 나라의 공주와 결혼하려고 했고, 인어공주는 자신의 언니들에게 그럴 거면 차라리 왕자를 죽여 버리고 다시 인어로 돌아오라고 단검을 건네요. 그러지 못했던 인어공주는 단검을 바다에 버리고 스스로도 몸을 던져 바다에 빠져 버리죠. 하지만 인어공주의 선행 덕분에 인어공주는 공기의 정령으로 변해 불멸의 영혼을 얻고 승천한다는 이야기에요.

칠판을 몇 번이고 지웠다가 새로 쓰고, 지웠다가 새로 쓰면서 아야 선배는 인어공주 이야기를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냥 부장이 말로 설명하는 편이 빠르지 않았습니까?”

난 설명하는 게 서툴거든.”

부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인어공주라고 하니 떠오른 건데, 일본에는 야오비구니라는 전설이 있는 걸 아니?”

이윽고 내가 동아리방을 나서려고 할 때, 부장은 불쑥 입을 열었다.

인어고기를 먹고 불로불사가 되어 전국을 떠돌아다녔다는 비구니가 있었다고 해. 죽지도 못하고, 한 곳에서 오래 살지도 못하고.”

나는 고개를 돌린 채 부장을 바라보았다. 부장은 기분나쁘게 웃고 있었다.

한심한 이야기지. , 난 설명하는 게 서툴다고 했잖아.”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문을 닫았다.

 

 

“T! 요새 많이 바빠? 만나기가 어렵네.”

박선배는 반갑다며 내 옆자리에 앉아 정신없이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새로 동아리 들었다며? 거긴 괜찮아?”

나이는 어리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이쪽 학교로 진학했다며 휘는 그녀에게 박선배라는 별명을 붙였고 나도 별다른 생각 없이 그렇게 불렀다. 그녀는 처음에는 부끄러워했지만 점차 그룹 안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도맡아 했고, 자기가 우리들보다 훨씬 선배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활기찬 모습이 썩 어울려 나는 가끔 그녀가 주최하는 술자리에 몇 번이고 참가하게 되었다.

별다른 건 아니고, 언어교환 연구회라는 데에 들어갔어.”

나는 그날따라 배가 고팠다. 박선배가 정신없이 떠들어대는 옆자리에서 혼자 맥주를 두병정도 먹었고, 안주 대신 볶음밥을 시켜 먹었다. 사람들은 북적이며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술을 마시고 떠들고 있었지만 내 주위에는 다른 사람이 와서 앉거나 이야기하러 오지는 않았다. 가끔씩 휘가 꼬인 혀를 필사적으로 놀려대면서 나와 같이 앉아 있는 박선배를 놀리러 왔다. 휘는 평소에도 술은 잘 못 마시는 주제에 술자리는 좋아하는 기묘한 성격으로, 술자리에선 언제나 얼굴을 새빨갛게 불태우며 떠들어대는 걸 좋아했다. 박선배는 그런 휘에게 술을 먹이려고 잔 한가득 맥주를 부어 주며 저거 사실 소맥인데하며 나를 보며 윙크했다. 그러고 보니 박선배도 아무 거리낌 없이 나에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세 병째의 맥주를 컵에 따르며 어느새 나에게 말을 놓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요샌 뭐 하고 지내?”

새 안주와 맥주를 시키면서 박선배는 했던 질문을 반복했다.

?”

새로 동아리 들었다며? 거긴 괜찮아?”

박선배도 말술이라 어지간해서는 취하는 적이 없었다. 태연한 얼굴로 휘를 술로 고꾸라트리는 장면은 꽤나 신선했었다. 한국에 있을 때도 술은 마셨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술을 마시지는 않았고, 대부분 집에서 혼자 술을 먹거나, 누나와 함께 마시곤 했다.

. 요새는 좀 편해졌어.”

그래? 다행이네.”

맥주잔을 부딪치며 박선배는 웃었다.

되게 걱정했거든. 나이도 많은 사람이, , 미안. 어쨌든, 그런 사람이 갑자기 모여서는 되게 분위기가 처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휘가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우리랑도 잘 어울려주고, 친해져 보니까 재미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랬나.”

나는 빈 잔에 맥주를 따랐다. 맞은편에 앉은 박선배는 오늘따라 말없이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 무슨 일 있어?”

술은 얼마 마시지 않았는데 얼굴도 빨개져 있고, 피곤한 일이라도 생겼는지 싶어 물었다.

아니, 아니. 아무것도 아냐.”

박선배는 손사래를 치며 가방에서 허겁지겁 무언가를 찾았다.

, 이거, 어제 게임센터에서 딴 건데, 어울릴까 싶어서. 선물.”

박선배는 가방에서 인형을 꺼냈다. 커다랗고 새까만 곰인형이었다.

왠지 T군이랑 닮아 보여서. 헤헤.”

나는 인형을 받아들었다. 잘 어울린다며 박선배가 깔깔 웃었다.

 

 

잠깐 나갈까? 바람 좀 쐬고 싶어.”

박선배는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휘에게 나갔다 오겠다며 손짓했지만, 휘는 소리를 지르며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그럴까.”

우리는 술집을 나와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샀다. 곰인형을 들고 아이스크림을 사는 나를 점원은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인형을 두고 나오기도 곤란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가방에 넣어두고 나오면 되지, 굳이 그걸...”

아니, 오늘은 아무것도 들고 온 게 없어서.”

나는 술자리에서는 언제나 바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가방이나 소지품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그런 식으로 도망쳤고, 술에 취한 휘는 기억을 못 했으니 별로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래? 그런 점은 역시 T군답네.”

박선배는 편의점 입구의 문턱에 걸터앉았다. 나는 그 앞에 섰고, 한동안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묵묵히 먹었다. 차가운 느낌이 술을 적당히 깨워 주었지만 나는 여전히 취하지 않았다.

...T.”

?”

, T군을 좋아하는 걸지도.”

나는 한동안 말없이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쓰레기통에 비닐을 버렸다. 박선배는 계속 땅을 바라보며 수줍은 얼굴을 숨기려고 했다. 새빨간 얼굴이 정말로 타 버릴 것만 같았다.

“...미안.”

나는 박선배에게 곰인형을 건넸다. 박선배는 울음을 참으며 인형을 받아들었다.

, , 그게 아니라...T군이, .”

“...미안.”

박선배의 울음 섞인 말을 끊고, 나는 뒤로 돌아 걸어갔다.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답이 없는 질문만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울었다.

 


그날부터 나는 수업이 끝나면 도쿄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요요기공원, 우에노공원, 신주쿠 교엔, 히비야공원 같은 공원들부터 아사쿠사, 오다이바, 아키하바라 같은 관광지. 시부야, 하라주쿠, 신주쿠 같은 번화가. 집 근처에 있는 학교들, 샛길, 지하철역.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보이는 풍경들을 그저 머릿속에서 사진을 찍듯이 바라보며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힘들었지만, 점점 오래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걷기 위해 새로 운동화도 장만했다. 보통이라면 절대 사지 않을 비싼 가격이었지만, 신고 걸어보니 훨씬 다리에 부담이 덜했다. 하루 종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지치면 집으로 돌아와 자고, 주말에는 도쿄를 떠나 먼 곳으로 여행을 가거나, 집에서 어디까지 걸어갈 수 있는지 실험해보기도 했다.

예전에는 빠짐없이 했던 예습, 복습도 점점 하지 않게 되고, 수업 시간은 대개 졸다가 시간이 끝났다. 물론 그 뒤로 박선배와는 마주치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로 매일 만나는 휘와도 서먹서먹해져 그도 더 이상 먼저 인사를 하거나, 친하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렇게 사라진 조용한 시간을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 달 정도를 지내오다가, 문득 동아리방에 놔둔 교과서를 생각해냈다. 중간고사가 다가오고 있었고, 아무리 관심이 없더라고 학점을 받지 못하면 큰일이었으므로 나는 학생회관으로 향했다.

 


오래간만이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동아리방에 들어가자마자 부장은 비꼬듯 말을 걸었다. 나는 말없이 교과서를 들고 나가려고 했다. 부장의 비웃는 듯한 시선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사람, 사람, 사람. 언제나 귀찮은 건 사람이지. 그렇지 않아?”

?”

나는 고개를 돌려 부장을 쳐다보았다.

사실 귀찮잖아. 누군가를 만난다. 누군가와 이야기한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생각해보면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도 아냐. 그저 살아가기 위해서. 혼자 있으면 뭔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일본에 와서 일본어를 한 마디도 안 하고 있는 상황이 무서워서 타인을 만나거나 말하고 있을 뿐이야.”

선배는 비웃듯 두 팔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뭘 하고 있는 걸까~ 같은 생각을 하겠지. 분명.”

네가 뭘 안다고. 나는 속으로 내뱉고 문을 열었다.

그만두고 싶지 않아? 그런 거.”

그만둘 수 있다고. 그런 거. 부장은 웃으며 말했다.

목소리를 나한테 팔면 돼.”

부장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악당모의라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판다고요?”

그래. 네 목소리를 나한테 팔면 자유롭게 해 줄게. 귀찮은 지금의 인간관계도, 늘지 않는 일본어도, 지우고 싶은 기억들까지.”

“...어떻게?”

나는 아야 선배를 떠올렸다. 칠판. 말할 수 없는 사정. 조만간 알게 된다.

그래. 그녀도 나에게 목소리를 팔았지. 이 목소리는 사실 그녀 거야.”

...떻게?”

나는 똑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처음 여기 왔을 때 기억해? 내가 일본인이냐고 물었지? 솔직히 좀 놀랐어. 들키지 않게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야.”

커다란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부장은 말했다.

별로 불편할 건 없어. 그 칠판은 의외로 쓰다 보면 익숙해진다더라고. 물론 나는 써 본적이 없지만 말야. 어때? 좋은 제안이잖아? 네가 끌어안고 있는 고민 전부와 목소리 하나. 나쁜 거래는 아닐 텐데?”

나쁜 거래였다. 목소리 없이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가.

한 마디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면 말이지. 벌써 요 며칠간 그래 봤잖아? 일본은 좋은 나라야. 정말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있어. 너를 모르는 타인은 너에게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 너를 아는 사람들에게서 너는 자유로워지고 싶어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생각해보고 결정해 줘. 나는 여기 있을 테니까.”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문을 닫았다.

공원을 걸으며 나는 부장의 제안을 생각해 봤다. 부장에게 목소리를 판다. 더 이상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두려움보다 그것이 가져다줄 고요함을 원하고 있었다. 누구와도 이어지지 않고, 누구에게도 신경쓰고 싶지 않다. 신경쓰이고 싶지 않았다. 한국에 있는 누나나,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숙여 울던 박선배나,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하지 않는 나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잃는다는 건 단순히 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단편적인 의미가 아니에요. 그 언어에 대한 기억을 잃는다는 것이죠.

아야 선배는 칠판에 담담히 글자를 써내려갔다. 그날따라 부장이 보이지 않았지만 부장을 만나면 제안에 대한 답을 내야만 할 것 같아 내심 안심했다.

다른 언어를 쓰면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건가요?”

사피어-워프 가설이군요. 언어에 따라 사고나 행동이 변하는 걸까요? 당신은 일본어를 쓰는 자신을 한국어를 쓰는 자신과 분리할 수 있나요?

선배의 글씨는 단정하고 깔끔했다. 선배는 부장이 입던 것과 비슷한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면접이라도 보러 가는 것일까.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빛나는 금빛 머리카락에 검은 정장이 썩 어울렸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선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니에요. 그렇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말에는 기억이 남아요. 그 목소리로 말했던 기억들, 그 목소리를 들었던 기억들이.

나는 가만히 기억을 되돌아봤다. 언젠가 봤던 수족관의 물고기들처럼, 기억은 거리감을 알 수 없게 반짝이고 있었다.

언젠가 인어공주 이야기를 했었죠?

.”

인어공주는 마녀에게 목소리를 대가로 다리를 얻어 육지로 올라와요. 처음 육지에 올라온 인어공주는 고독했지만 한편으로 기뻐하지 않았을까요? 앞으로 시작되는 왕자와의 새로운 삶이.

아야 선배는 칠판을 나에게 건넸다.

그리고 잊어버리는 거에요. 꼬리를 달고 바다를 헤엄치던 때의 기억을. 나는 그렇게 되고 싶었어요.

내가 선배를 본 것은 아마도 그것이 마지막이었으리라고,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다음날, 나는 부장에게 말했다.

목소리를 파는 건 무리에요. 나는 돌아가야 합니다. 올해가 끝나면 유학도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그럼 그 기간 동안만 파는 건?”

부장은 홈쇼핑 호스트처럼 손을 맞대고 비볐다. 상황이 너무 좋게 돌아가는 게 아닌가?

지금까지의 정을 생각해서 해 주는 대 서비스라고. 감사하다는 말을 듣지는 못할망정.”

부장은 여전히 아야 선배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야 선배는 목소리를 돌려받지 못한 걸까.

“...좋아요. 정말로 모든 게 해결되는 거겠죠?”

그래. 모든 게 해결될 거야. 걱정하지 마. ”

동아리 문을 나서는 내 등에 부장의 목소리가, 아야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눈을 뜨는 순간부터 시작이야.”

문을 닫고 나서면서 나는 내일 수업에 들어가서 교수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가 제일 먼저 고민되었다.

그런 걸 걱정할 필요는 없어. 모든 게 평소와 똑같을 거야. 네가 목소리를 잃고, 고민이 해결 된 것 이외에는.”

문틈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를 나는 듣지 못했다.

 


인어의 목소리. (1) by 임기간

 

 

 

 

아침 9시부터 시작되는 수업인데도 앞자리의 중국인 여학생들의 목소리에는 활기가 넘쳤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펜을 빙글빙글 돌렸다. 선생님은 출석부를 꺼내 카타카나로 더듬더듬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 나가기 시작했다.

, 출석 불렀어?”

어느새 옆 자리에 숨을 헐떡이며 휘가 앉았다.

아니, 지금 부르는 중.”

휘는 해냈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교실은 그제야 어느 정도 조용해졌고, 선생님은 출석을 다 부른 뒤 수업을 시작했다.

어학당 수업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일본어를 전공하고 있었고, 보통보다는 훨씬 늦은 시기에 유학을 왔다.

좋은 아침~”

, 왔어? , 라인 봤냐?”

30분 정도 지났을까, 내 뒷자리에 일본인 여학생이 앉았다. 그녀는 휘의 친구로, 제시간에 교실에 들어오는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정신없이 어제 있었던 누군가의 추태에 대해서 일본어로 깔깔거리며 떠들었다. 나는 속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집중했으나 이내 포기하고 혼자 교과서를 읽기로 했다.

휘 군, 카와시마 양, 조용히 하세요. 수업 중이니 용건이 있으면 나가서 하세요.”

참다못한 선생님이 수업을 중단하고 두 사람을 지적했다. 반의 모든 시선이 왜인지 나에게 모이는 기분이 들어 기분이 나빴다.

~ 죄송합니다~”

휘와 여학생은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했다. 나는 그가 고개를 숙인 채 낮게 말하는 한 마디를 흘려들으면서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꼰대가 지랄은.”

사람 좋은 웃음 밑에 깔린 차가운 그 목소리에, 나는 아무 말 없이 수업을 듣는 척을 하며 펜을 빙글 돌렸다.

 

 

, 그놈의 꼰대. 맨날 나한테만 지랄이지.”

휘는 가방을 빙글빙글 휘저으며 걸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휘와 함께 어학당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학생회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박선배가 오늘도 술 먹자는데, 갈래? 이케부쿠로에서 알바 끝나고 10시쯤 모인대.”

별로 생각 없어.”

나는 가방에서 칼로리메이트를 꺼내 입에 물면서 대답했다.

맨날 생각이 없지. 그러니까 그렇게 축축한 거 아냐.”

휘는 놀리듯 빙글 몸을 돌려 나를 보며 웃었다. 휘는 매일 수업이 끝난 뒤에는 동아리 활동을 하러 학생회관에 들렀고, 나도 집에 가는 지하철역으로 가는 겸 그와 함께 학생회관까지 가곤 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지만, 그와 나는 학교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었다. 어학당에 처음 온 날 나에게 처음 말을 걸었기 때문일까,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서로의 나이 차이를 알고도 서슴없이 말을 놓는 서글서글함이 신선해서였을까. 그는 대학에 처음 들어온 신입생다운 경박함을 체현한 듯한 인간이었다. 잘생긴 얼굴에도 불구하고 연애는 해 본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여자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여자와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루 종일 공부하는 것보다 사람도 좀 만나고, 이야기도 좀 해야 일본어가 늘지 않겠어?”

휘는 어제 미팅에서 만난 여자아이들에 대해 한동안 떠들어대다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불쑥 그렇게 말했다.

맨날 수업 듣고 집에 가고, 일본엔 뭐 하러 온 거야?”

나는 가만히 엘리베이터의 계기판을 바라보았다. 그러게 말이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럼 난 갈게. 내일 봐.”

휘는 손을 흔들며 웃었다. 나는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부모처럼 손을 흔들어 주었다. 혼자가 되고서야 겨우 나는 참아왔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몸을 돌려 학생회관을 나가려다 엘리베이터 옆에 붙어있는 층별 동아리 안내 벽자에 눈이 갔다. 영화연구회, 만화연구회, 애니메이션 제작부, 꽃꽂이부, 오케스트라, 댄스팀...다양한 사람들이 커다란 건물 안에서 제각각의 삶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동아리들의 이름을 훑어보다 문득 외국인 언어교환 연구회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8307.

일본엔 뭐 하러 온 거야?’

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 가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으로 향했다.

 

 

철제 문은 생각보다 메마른 소리를 냈다. 문 너머에서 어렴풋이 소리가 난 듯하여,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의 공간은 생각보다 좁았고, 4~5인용의 기다란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고, 책이 한가득 꼽힌 책장이 하나, 창문 앞에 놓인 커다랗고 검은 가죽 의자가 눈을 사로잡았다. 전반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벽을 면한 책상 옆자리에 앉아 있던 금발의 여성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나는 당황하여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관심이 있어 구경하러 왔습니다만...”

외국인이겠지, 외국인 언어교환 연구회이니만큼. 내가 멀뚱히 입구에 서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성거리고 있자 금발의 여성은 웃으며 손짓으로 앉으라고 권했다.

그녀는 대학원에 다니는 아야 선배라고 해요. 사정이 있어 말을 못 하니까 그 점은 이해해 주세요.”

돌아서 있는 검은 가죽의자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자가 빙글 돌아서 나를 향했다.

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잘 부탁해요.”

부장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그녀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면접이라도 온 것 같아 나는 무심코 자세를 바로잡고 섰다.

유학생? 어느 나라에서 왔나요?”

부장은 느긋한 일본어로 말했다. 수업에서 선생님들이 하는 일본어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어학당에 다니고 있고, 온 지는 2개월 정도 됐습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생각했던 말들을 꺼냈다. 아야라고 하는 선배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 2개월이라. 일본어를 꽤 잘 하시네요?”

부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국에서 전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둘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그제야 머뭇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아야 선배는 책상 위에 놓인 자석 칠판에 처음 뵙겠습니다는 일본어를 써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어릴 적에 많이 가지고 놀았던, 자석식으로 글자를 나타내는 오래된 방식의 칠판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동아리에 관심이 있으시다구요?”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에서 서류철을 꺼내며 물었다.

. 언어교환...이라기보다 일본어를 좀 더 말할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부장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아야 선배 쪽에 놓인 책자와 서류를 흘끗흘끗 바라보았다. 일본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듯, 고전문학 작품이 빼곡히 인쇄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제대로 왔어요. 기본적으로 여기 오면 적당히 이야기하는 게 전부고, 공부를 하고 싶다면 해도 되고, 느긋하게 지내면 돼요.”

뭔가 대외적으로 하는 일은 없습니까? 축제라든가, 행사라던가...”

그런 건 안 해요. 와서 평범하게 대화하는 것 이외에는. 언어교환 연구회니까요.”

다른 동아리원은 없습니까?”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좁은 공간에는 많아봤자 다섯 명 정도가 들어오면 가득 찰 것 같았다.

당신이 가입한다면 총 세 명이 되겠네요.”

그래서 동아리가 유지는 되는 걸까? 한국에서 다녔던 대학에서는 동아리를 유지하려면 대외행사도 해야 하고, 인원도 적어도 다섯 명 이상은 필요했던 걸로 알고 있었다.

이렇게 작은 인원으로 괜찮습니까?”

그런 건 상관없어요. 사람이 많다고 좋은 건 아니니까.”

그것만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부장은 방긋 웃었다.

그런데...부장은 일본 사람입니까?”

침묵. 아야 선배의 손이 멈췄다. 부장은 의자에 깊게 몸을 묻고 천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 뭔가 이상한가요?”

, 아닙니다.”

나는 아야 선배가 내민 입부원서에 인적사항을 기록했다.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그래요. 수고했어요.”

수고했다니, 여기선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까. 나는 문을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어렴풋이, 부장의 목소리와 외모가 맞지 않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마치 사이즈가 맞지 않는 다른 사람의 옷을 입은 것 같이.


어머니의 일기장. by 임기간

 

어머니의 일기장.

 

 

 새하얀 크림 위에 놓인 딸기를 보며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이가 시릴 정도로 달콤해 보이는 케잌 사진을 바라보면서 페트병에 담긴 생수로 입을 다셨다. 언제나 명절이 되면 우리 가족은 할머니 댁에 모였고, 같은 또래의 사촌도 없던 나는 친척 어른들의 관심을 피해 다락방으로 도망치곤 했다. 친척들의 관심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할 때부터, 사실 그 관심이 그저 부모님에 대한 지나친 오지랖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나는 한결같이 다락방에서 명절을 보냈다. 나는 말수가 많지 않았고, 낯을 심하게 가렸으며, 엄마는 그런 나를 언제나 못마땅해 하면서도 다락방에 가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 때가 되면 살그머니 식탁에 앉아 식사를 마치고, 식기를 싱크대에 내려놓고 다시 다락방으로 되돌아갔다. 집안의 막내였던 나는 재롱을 부리며 관심을 끌어모으기보다, 무관심을 얻어내려 필사적이었다.


 엄마는 다락방을 언제나 말끔하게 유지했다. 매년 엄마는 나를 데리고 훌쩍 둘이서 할머니 댁에 갔고, 그때마다 엄마는 집안을 청소하고, 억센 손으로 밀린 집안일을 하나씩 해치워 나갔다. 나는 할머니가 주는 용돈을 엄마 몰래 뒷주머니에 넣고, 창고에 놔둔 박카스 상자 속에서 갈색 유리병을 엄마한테 들키지 않게 챙겨나와 조용한 마을을 걸어 다니며 마시곤 했다. 엄마는 아무도 가지 않는 다락방을 누가 검사라도 하듯 깨끗하게 정리했다. 나는 언젠가 엄마를 따라 올라간 다락방이 퍽 마음에 들었다. 다락방에는 오래된 전축과 등나무로 짠 안락의자가 있었고, 두 손을 활짝 펼쳐도 모자란 크기의 책장이 다락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책장 속에는 한 손에 들어갈 정도의 크기의 요리책과 들기도 어려울 정도로 무거운 사진 앨범들이 빼곡히 꼽혀 있었다. 요리책은 플라스틱 스프링으로 되어 한 장씩 넘겨가며 읽는 형식이었고, 종이가 오래되어 그 안에 실려 있는 글자와 사진도 누렇게 바래 있었다. 누렇게 변해버린 요리책 전집 중에서 나는 케잌 레시피가 한가득 들어있는 책을 제일 좋아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다 보니 플라스틱 스프링이 너덜너덜해지고, 페이지가 몇 장씩 빠져나가려고 하는 그 오래된 요리책을 읽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케잌들이 떠올랐고, 그 모습과 맛을 상상하는 것은 매우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날도 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 책장을 열어 요리책을 훑어보고 있었다. 몇 달 뒤가 수능이라 나는 적잖이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고, 공부할 책이 든 가방을 들고 친척들에게 인사도 없이 다락방으로 올라가도 부모님은 민감한 시기라며 친척들의 관심을 막아 주었다. 다락방에 올라오자마자 가방을 구석 언저리에 집어던지고, 나는 의자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멀미로 어지러운 의식이 가라앉자, 나는 책장으로 다가가 언제나처럼 요리책을 훑어보았다. 제일 좋아하는 37번 케잌 요리책이 제일 중앙에 꼽혀 있었고, 순서가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요리책들이 난잡하게 꼽혀 있었다. 나는 평소에도 정리정돈을 잘 하는 편이 아니었고, 불편함을 느끼지도 않았지만 문득 시간 때우기에는 제격이다 싶어 책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요리책을 한권씩 꺼내 순서대로 쌓아 올리며, 도중도중 눈길이 가는 책을 읽었다. 간단히 만드는 궁중요리, 스테이크, 초콜릿, 중화요리, 경양식...책장에서 책을 전부 꺼내니 다락방 안은 책으로 가득 찼다. 숨을 돌리며 빈 책장을 바라보니 책이 꼽혀 있던 위치에 얇고 오래된 공책이 한권 떨어져 있었다. 책들 사이에 끼여 있었는지, 나는 그 공책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공책을 펼치니 그 안에는 삐뚤삐뚤한 글씨가 빼곡히 쓰여 있었다. 날짜는 쓰여 있지 않았지만, 내용을 훑어보니 일기인 듯 했다. 나는 책을 다시 집어넣다 말고, 등나무 의자에 몸을 묻고 공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매일 하얀 옷을 입는다. 밭에 나갈 때도, 집에서 밥을 만들 때도. 나는 할머니가 입는 하얀 옷이 멋있어 보여서 엄마한테 하얀 옷을 사달라고 졸랐더니, 엄마는 매일 알록달록한 색깔의 옷을 사 온다. 한번은 엄마가 새하얀 원피스를 사다 줬는데, 왜 할머니가 입을 때는 그렇게 멋있어 보이는 게 내가 입으면 별로일까. 이상하다.


나는 할머니랑 같이 산다. 엄마는 선생님이다. 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온다. 엄마는 여름만 되면 나를 할머니한테 데려다 주고 돌아간다. 나는 엄마가 뭘 하는지 잘 모른다. 할머니 집은 불편한 게 많다. 티비도 맘대로 못 보고, 전기도 밤이 되면 꺼진다. 따뜻한 물도 마음대로 안 나오고, 가마솥 옆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할 수 있다.

할머니는 아침 일찍 일어난다. 나는 좀 더 자고 싶은데, 할머니는 한 번도 늦잠을 자게 해 준 적이 없다. 아침을 먹고 둘이서 밭에 나간다. 할머니가 밭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산을 여기저기 둘러본다. 산딸기도 따 먹고, 나무그늘에서 잠도 자고, 더우면 냇가에 풍덩 빠져 있기도 한다. 할머니는 점심을 먹기 전까지만 일을 하고, 점심을 먹고 나면 집에서 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있는다. 나는 이때가 제일 심심하다. 할머니가 읽는 책은 글자가 너무 작고 한자가 많아서 재미가 없다. 할머니는 책을 읽고 있을 때는 내가 자고 있어도 혼을 내지 않기 때문에, 나는 맨날 낮잠을 잔다.


해가 지면 저녁을 먹고, 할머니는 다락방에서 촛불을 키고 음악을 듣는다. 검정색 커다란 상자에서 음악이 나오는 건 언제 봐도 신기하다. 레코드판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걸 보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졸리지가 않았다. 한번은 레코드판을 가지고 놀다 그걸 깨먹은 적이 있는데, 그날은 할머니한테 엄청 맞았다.

 

 

 레코드? 이 일기는 누구의 것일까. 나는 다락방을 두리번거리며 전축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나는 책장을 받치고 있는 기다란 찬장에 작은 여닫이문이 달려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여닫이문을 열어 보니 먼지로 가득한 퀴퀴한 냄새 속에 금색으로 빛나는 전축과 스피커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레코드판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나는 다시 일기장을 손에 들고, 거기에 적혀 있는 글씨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눈에 익은 듯, 익지 않은 듯한 글씨였다. 나는 요리책들의 숲을 간신히 빠져나와 구석에 있는 가방 속의 필통에서 샤프와 공책을 꺼냈다. 할머니는 매일 하얀 옷을 입는다. 일기장의 맨 첫 문장을 그대로 따라 적고, 나는 내 공책과 일기장을 두 손에 들고 글자를 비교해 보았다. 무척 비슷해 보이기도, 그렇지 않기도 했다. 내가 이런 일기를 쓴 적이 있었나? 나는 우두커니 서서 멍하니 예전 기억을 되돌아보았다.

 


할머니한테 전축은 어디서 났냐고 물어봤지만, 할머니는 대답해주지 않는다. 언제나 할머니는 그렇다. 나한테 뭘 시킬 때도, 혼을 낼 때도, 칭찬해줄 때도. 엄마처럼 나한테 많을 걸 시키지도 않았고, 맨날 공부하라며 옆에서 이것저것 알려주면서 정신없이 떠들지도 않았다. 나는 시끄러운 엄마가 싫고,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싫다. 나는 아무 생각도 없는데, 선생님이고 엄마고 친구들이고 너무너무 시끄럽다. 나는 그래서 할머니가 좋았다. 할머니와 나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부르며 작은 심부름을 시키거나, 밥을 먹으라고 한다. 나도 시키는 것 이외에는 아무 말 없이 할머니 옆에 붙어 있었고, 우리는 손을 잡고 밭으로 나갔다가,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음악을 듣다 잠이 들었다. 잠에 들기 직전, 내가 몽롱하게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으면 할머니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몇 마디 짧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지금에 와서는 기억도 나지 않는 내용이었지만, 할머니의 까끌까끌하고 주름진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그 감촉만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할머니가 가끔 읍내로 장을 보러 갈 때, 나는 집에 혼자 남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다락방에 혼자 올라갔다. 할머니가 매일 읽는 책이 뭔지 궁금해서였다. 의자 옆에 놓인 작은 상 위에 놓인 할머니의 책을 펴자, 노란 종이에 예쁘게 적혀있는 글씨들이 보였다. 한자가 섞여 있어 내용을 읽을 수는 없어서, 할머니가 읍내에서 돌아오자 책의 내용을 물었다. 할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건 책이 아니라 일기라고 했다.


나도 일기를 쓰고 싶다고 했더니, 할머니는 공책을 사다 주었다. 매일 밤 레코드로 음악을 들으면서 일기를 썼다. 하루하루 일어난 일을 다 쓰고 나니까 더 쓸게 없었다. 할머니는 예전에 있었던 일이나, 내가 생각나는 일을 써도 된다고 해서 나는 열심히 일기를 썼다. 할머니의 글씨에 비해 내 글씨는 못생겼지만, 할머니의 일기를 가끔 혼자 훔쳐보면서 예쁘게 써 보려고 흉내를 냈다.


여름이 끝나가고 새 학기가 다가올 무렵이 되면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온다. 엄마는 언제나 할머니한테 같이 집에서 살자고 하지만, 할머니도 언제나 고개를 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집에 가기 전날, 나는 다락방에 몰래 숨어들어가 일기장을 책장에 숨겨 놓았다. 키가 닿지 않아 읽을 수 없었던 요리책이 있는 책장에 의자를 딛고 올라가 요리책 맨 구석에 공책을 숨겨놓았다. 다음에 다시 할머니랑 둘이 살게 되면 써야지.

 

 

 일기는 거기서 끝났다. 매년 어머니와 함께 할머니 댁에 간 건 분명히 여름이었다. 나는 할머니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목소리와 얼굴이 희미하게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흰 옷을 입고 있었는지, 어떤 모습으로 웃었는지는 아무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일기장의 글씨는 뒷장으로 갈수록 깔끔해졌고, 점점 일기를 쓰는 사람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할머니에 대해 선명하게 가지고 있는 기억은, 집안일을 끝낸 어머니가 읍내에 나가 사온 팥빙수를 할머니와 셋이서 먹은 일이었다. 해질 무렵의 툇마루에서 플라스틱 용기에 우유를 한가득 담아 먹었던 팥빙수의 달콤함만이 기억 속에 남아 있었고, 그 옆에는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이건 어머니가 쓴 일기장일까? 나는 오래된 공책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제조일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색이 바래버린 공책 겉면에는 아무런 표시나 글씨가 쓰여있지 않았다. 어머니의 할머니. 증조할머니를 만나본 적은 없다. 할머니는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셨다.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의 일이다. 나는 한 방울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것만을 기억하고 있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눈물을 흘릴 정도로 철이 들지도 않았고, 나는 그저 할머니 집 한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도,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기장을 팔락팔락 넘기다 보니, 맨 뒷장에 누군가가 써 놓은 글이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례식은 조촐하게 가족들끼리만 하기로 했고, 오늘 발인이 끝났고, 엄마는 아직 손님상을 차리느라 바쁘시다. 나도 정신없이 일했다. 손님에게 드릴 음식상을 차리고 있으면 그나마 울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다락방에 혼자 도망쳐서 옛날 일기를 읽고 있다 보니, 문득 오늘의 일도 적어놓아야 할 것 같았다.


 할머니는 우아한 사람이었다. 당신이 살아온 세월과 풍파에도 할머니는 우직하게 그것을 지켜온 사람이었다. 어릴 적에 몰랐던 여러 가지 사실들이 일기를 읽으면서 떠올랐다. 몽매하고 속 썩이는 딸과 딸이 매년 내팽개치는 손주를 돌봐주는 것이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이었을지, 나는 지금도 상상할 수 없다. 할머니가 차마 말하지 못한 여러 가지 것들이, 그럼으로써 나를 지켜주었던 그 모든 것들이 너무도 그립다. 효도해 드리고 싶었는데, 이제 겨우 당신과 지낸 날들의 기억이, 추억이 고마움으로 다가오는데, 철없는 내가 너무도 늦었다. 할머니가 보고 싶다.

 

 할머니는 우아한 사람이었다.

 

 

 일기의 마지막에 내 글씨가 쓰여 있었다. 어째서 내 글씨가 여기 쓰여 있는 걸까? 나는 이 일기장을 예전에 본 게 아닐까? 기억이 혼란스럽게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는 요리책을 순서대로 책장에 꼽아 놓고, 일기장을 공책과 함께 가방에 넣었다. 부산한 명절이 끝나고, 나는 일기장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끔씩 공부에 질릴 때, 서랍에서 일기장을 꺼내 읽어 보았다.

 “증조할머니는 어떤 분이었어요?”

언젠가 식사를 하면서, 나는 어머니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어머니는 밥을 가만히 씹어 넘기시고, 나를 바라보았다.

 “?”

어머니의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비밀을 들킨 쪽이 스스로인 것 같아, 나는 쑥스럽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어머니는 미소를 지었다.

 “기억이 잘 안 나는데...좋은 분이셨어.”

어머니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나는 더 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다음 날, 공부를 하다 말고 책상 서랍을 열어 보니, 오래된 일기장 위에 새 공책이 놓여 있었다. 할머니는 우아한 사람이었다. 공책을 펼치니 어머니의 글씨가 검정색 펜으로 쓰여 있었다. 나는 오래된 일기장을 펼쳐 어머니의 글씨를 확인했다. 그날 밤,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새 일기장에 쓰고, 오래된 일기장을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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